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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인데 혼자가 아닌 세계

  • 작성자 사진: MKJO
    MKJO
  • 3월 23일
  • 5분 분량



24년 7월 7일 오전 4시 46분 메모


혼자인데 혼자가 아닌 세계.

전주 한옥마을의 한옥숙소, 교동살래의

1인실, 과꽃 방.


이 방의 차이점은 다른 방에는 없는 책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책상이 있는 숙소를 좋아한다. 보통 책상 위에서 뭔가를 끄적이거나, 지난 여행의 루트를 둘러보거나,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지 일정을 점검하기에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종종 책상이 없는 숙소들이 있다. 게다가 호텔은 책상이 아닌 티테이블이나 작은 붙박이형 비즈니스 테이블이 있는데 이것은 책상하고는 거리가 멀다. 책상은 폭과 너비가 넉넉해야 한다. 말 그대로 책상.)


게다가, 보통 숙소의 방명록이라고 하면 공용공간에 하나씩 구비가 되어있는데 교동살래는 각각의 방에 방명록이 있는 듯 했다. 내가 묵을 과꽃방 안에는 이 방을 거쳐간 사람들이 하나둘 페이지를 채워나간 수첩이 책상에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 모니터 뒤에 숨겨져 있어서 자칫하다간 혹은 바쁜 일정이었다면 못보고 지나칠 위치에 숨어있었다.


2024 전주책쾌. 작년에 이어 올해도 문전성시를 이룬 행사다. 전주에 연고도 없고 한 번도 발길을 한 적 없는 지역이었으나 책쾌라는 북페어의 참여로 난생처음 작년에 홀로 전주를 방문했다. 덕진공원의 연화정도서관, 혼자 걸었던 전주 한옥마을, 같은 전주 토박이 책쾌분들이 하나둘 소개해 주셨던 전주의 작고 예쁘고 맛있는 카페와 식당들. 여러모로 전주에 대한 좋은 기억들 뿐이었다.


작년에 이어 다시 방문한 전주. 올해는 숙소를 개인실로 정하고 남부시장(책쾌 행사장 위치) 근처가 마침 한옥마을이라 거금 8만원을 들여 예약한 교동살래의 개인실, 과꽃.


이곳 숙소 운영진분께서는 미리 청소를 해두시고, 무인으로 안내를 문자로 하여 난 셀프체크인을 밤 늦게 한 후 들어왔다. 일반 호텔이나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도 좋지만 교동살래는 투숙객 한명한명을 위한 안내를 해주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저 개인 문자로 셀프체크인 하는 법과, 체크인 시간을 묻는 것, 예약을 문자로 하는 것 정도였지만 인터넷이 아닌 핸드폰 통신망을 통해 서로의 개인 휴대폰으로 숙박 확인사항을 주고 받은 것 정도로 조금은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세상은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건조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 이 정도로 따뜻함을 느꼈을 정도이니까.)


잠을 5분도 자지 못한 상태에서 책쾌 첫날을 치뤘다. 예정되어있던 해파랑통닭에서의 앞풀이 참가를 취소했다. 너무너무 졸려서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책쾌에는 수 많은 분들이 방문해주셨고 책의 판매도 작년을 넘어 가장 좋은 실적(?)을 거두었다. 모든 분들이 책이 다 잘 팔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 그대로 잔치의 분위기였다. 행사시간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로 조금 힘들긴 했으나 이 말이 무색할 만큼 끊이없는 방문객들의 발걸음으로 잠이 오다가도 계속계속 독자분들을 맞이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첫 날 행사시간의 종료가 가까워짐에 따라 날밤을 새고 온 나는, 급속도로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고대하던 앞풀이 취소를 하여 2만5천원을 환불받았다. 8시가 되자마자 나는 곧장 카트만두 배낭에 짐 몇가지를 간단히 챙겨서 교동살래로 걸어갔다.


무인셀프체크인(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냥 방으로 들어가기)을 한 후, 바로 집에서 입던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무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폭신한 메모리폼 침구 위에 누웠다. 에어컨은 시원하게 켜두고. 잠시만 쉬었다가 다시 샤워하고 밖에서 저녁식사를 할 예정이었지만 몸을 뉘인 나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눈을 뜨니 새벽 1시. 화장을 지우지도 않고 숙소의 불은 켜둔 채 에어컨은 가장 춥게 틀어놓은 상태에서 기진맥진 잠들어버렸다. 눈을 떴을 때에도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상당히 피곤했다. 그러기를 또 한 시간 정도..


눈을 떠 옆을 보니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전구 장식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눈이 마주쳤냐고? 천사 주물이다. 아기천사의 눈과 내 눈이 딱 같은 눈높이였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듯 해 살짝 소름이 끼쳤다.


그 길로 어서 세수를 하고 조명을 끄고 싶다는 생각에 나무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새벽 2시에야 씻기 시작했다. 아 너무 개운해. 숙소의 어메이티가 잘 구비되어 있어서 좋았다. 집에서 미쳐 가져오지 못한 고무줄이 마련되어 있었다. 치렁치렁한 머리를 싹 묶고, 이번에 새로 산 토니모리 오일젤 클린져로 얼굴을 문지르니 마사지가 되면서 피로가 풀리는 듯 했다.


이제는 배고프다. 하지만 이 근처 새벽 2시에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해파랑통닭은 심지어 일요일엔 문을 닫는단다. 정말 먹고 싶었는데…





그러다 책상에 앉아 놓여있던 방명록 노트를 읽기 시작한다. 과꽃방의 작은 조명은 노란빛이 난다. 그 아래서 읽어 내려간 과꽃방 이야기. 첫 페이지부터 영화를 보는 듯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의 접속이 시작된다. 지금은 새벽 3시이며 이 노트는 2023년 10월부터 시작된다.


불과 다섯 페이지정도 읽었을 뿐인데 이곳 과꽃방 사람들을 만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방은 혼자 대부분 여행하는 사람들이 묵는 방이다보니, 하나같이 자신의 일기와 시로 가득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왔다면 이런 이야기를 천천히 쓰고 읽을 시간과 마음은 없었겠지.


이런 문장이 있었다. 과꽃방 방명록으로 인하여 <혼자인데 혼자가 아닌 세계>라는 글귀. 너무도 아름다워 나도 우선 노트가 아닌 내 메모장에 이 상황을 기록한다.


책 때문에 가져온 거지만, 나의 대학시절 배낭여행을 온전히 다 책임졌었던 카트만두 백팩을 매니 정말 오랜만에 여행자 기분이 들었다. 이후 한동안 10년은 캐리어를 이용했었다. 그러나 카트만두 백팩은 나의 전성기, 가장 자유로워서 모든 감정이 풍족하여 아름다웠던 2013~2014년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지금 내가 맞이하고 있는 건 방명록의 수많은 일기들과 볼륨 1로 틀어놓은 오래된 한국 노래들.. 나미, 박화요비 같은.


여행과 휴가. 이 둘은 다른 성격이다. 여행은 신나는 느낌이고 즐거움이건 두려움이건 호기심이건 뭔가를 얻어가려는 활기찬 기운이 있다. 그러나 휴가는 뭔가를 깨끗이 비워내거나 자신으로의 침잠,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 혹은 작게만 보던 세상과 시간을 뛰어 넘어 가장 큰 세계를 보게 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만들어준다.


과꽃방 사람들은 대부분 쉼을 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오롯이 혼자 하는 쉼. 그렇기에 과꽃방은 더욱 특별했다. 쉬기 가장 좋은 곳은 머물고 있는 숙소이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장소에서 쉬고 간 것일까.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이 곳을 머물다 갔을까.


여기, 많은 사람들이 혼자 와서 고백하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자기가 얼마나 바보같은 지를, 고백하고 인정하며 털어놓고 있다. 난 솔직히 눈물이 많이 났다. 나 말고도 이곳 과꽃방 사람들도 그러했을거다. 또한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과꽃방 사람들을 서로를 위한 글귀를 남겨놓고 간다. 여기엔 남녀노소의 분류가 없다.. 그렇게 연결되고 있다.


한 페이지의 방명록. 그 뒷페이지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을 노트공간이었겠지만 다음날, 다다음날 노트는 계속 채워지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앞전 사람들로부터 위안을 받았으며, 이후의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위안을 남겨두고 간다.


“우리 또 봐요.”


혼자이지만 혼자이지 않은 세계.


방명록에서 읽은 전주맛집-

백수의 찬 (된장우동 추천)

묵로국밥 (15,000원짜리 무슨 국밥)

돈카츠 흑심 (히레 추천)

한이반점 (간짜장)


추리소설 추천도 있었다. 쓰레기같은 가짜 추천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과꽃방에서 본 추천은 가장 믿을만한 추천이겠지.


1인 여행객만을 위한 숙소를 운영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난생 처음 했다. 물론 돈 생각 안했을 때에. ㅋ 여긴 그만큼 아름다운 공간이다.


어느 특정 날짜의 방명록 글을 보고 답장을 써내려 간 사람도 있었다. 원 글의 내용은 무척이나 힘든 날을 보내고 있다는 글이었다. 며칠 후 그 방을 묵었던 사람은 며칠 전 그 사람의 글을 읽고 답장을 기록했다. 자신의 힘듦을 고백하며 써내려간 그 사람은 그 이후 사람의 답장을 읽지는 못했겠지만.. 그걸 지금 내가 읽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어떤 사람은 노래를 추천했다. 이후의 사람은 그 노래를 들으며 자겠다는 답문을 쓴다.


무주영화제, 전주영화제.

이곳은 영화제를 많이 하는구나. 좀 가보고 싶은데.

나는 나를 잘 몰랐으나 혼자 하는 여행이 나를 알게 한다.


10년만에 교동살래에 다시 방문하여 글을 적은 이도 있었다. 20대에서 30대가 된 사람이었고 그 동안 외국에 나가 살았다고 한다. 10년은 버거웠지만 돌이켜보면 아름다웠다고 한다.


쉬는게 무서워 쉬지 못한 날들. 그러나 이제는 지난한 그 길에 있었던 못다 본 그 꽃들을 만나러 가고 싶어졌다는 글도 있다.


그리고 과꽃방에만 있지 말고, 손수 그린 교동살래 정원 그림과 함께, 정원에도 나가보라는 글도 있다. 그 곳에는 수국과 장미, 에키네시아가 있다고 한다.



난, 7월 6-7일, 1박을 여기서 묵는다. 내 바로 앞 사람의 글은. 일주일 전 묵은 커플인듯 한데 밝은 사람들이었다. 바로 요 앞 다리에서 밤에 막걸리 마시며 야경보기 좋다는 정보를 남겨두었다.


나도 이제 핸드폰을 내려놓고 노트에 방명록을 써내려갈 것이다. 이후 과꽃방에 도착할 사람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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